매화나무, 살구나무, 목련, 벚꽃, 개나리, 진달래... 매일매일 꽃으로 짠 양탄자가 들판 가득 펼쳐지는 계절, 봄이 왔습니다. 제 방 앞엔 3층 높이로 자란 아름드리 벚나무가 서 있습니다. 유리창 바로 앞으로 지나는 나뭇가지엔 꽃봉오리가 구슬처럼 매달려 반짝거리고 있습니다. 곧 꽃봉오리가 톡톡 터질 듯 한껏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놓칠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봄이 오면 티셔츠 한 장 입고, 운동화 신은 가벼운 차림으로 자꾸 밖에 나가고 싶어집니다. 주택에 살 땐 마당에 나가 잡초를 뜯었습니다. 장마가 오기 전까지 바랭이 풀, 망초, 사초를 부지런히 뽑아야 합니다. 아차 하면 쇠뜨기 풀인 장마철에 죽순처럼 자랍니다. 아기 잡초는 손으로 쏙 뽑히는데, 장마를 지나면 두 손으로 잡아당기며 무릎을 굽혀 체중을 실어 무 뽑듯 온 힘을 다해 뽑게 됩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몇 배 더 들어갑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며 잡초를 뽑는 일이 버거웠는데, 막상 아파트로 이사한 다음 제일 그리운 것은 잡초 뽑기입니다. 뽑아낸 잡초 뿌리에서 풍기던 흙 향기가 그립습니다.

몸을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잡초를 뽑을 땐 머릿속에서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흐릅니다. 우뇌가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를 할 때나, 샤워를 할 때, 빨래를 개거나 청소할 때도 그렇습니다. 우뇌는 감성의 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관과 통찰을 담당합니다. 현대 사회에선 이성, 즉 좌뇌를 주로 사용합니다. 늘 논리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과열됩니다.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은 좌뇌 스위치를 잠시 내려 휴식하게 돕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질까 걱정되지만, 뇌 역시 쉬어야 생산성과 효율이 높아집니다.

정원 놀이가 가장 좋습니다. 흙에 살고 있는 미생물은 우리 몸에 유익한 균입니다. 알츠하이머 질병에도 도움을 주고, 면역력을 강화시키며, 우울증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래미안이지만 아파트의 특성상 개인 정원을 갖긴 어렵습니다. 마당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화분을 몇 개 모아 높낮이가 있는 화단을 만들면 정원의 역할을 합니다. 식물에 분무해 줄 때 반짝거리는 초록 잎, 피부에 닿는 식물의 촉감, 젖은 흙의 향기, 물을 준 다음 화분 받침에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 바람결에 흔들리는 식물이 만드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오감을 깨웁니다. 감각은 시선을 현재로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은 살며 누구나 과거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갑니다. 덕분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걱정부터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원을 과거와 미래에서 분리해, 지금을 살도록 돕습니다.

화분을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다면 45센티미터 철제 테이블 위에 3천 원짜리 비닐 포트 화분 10개쯤 올려 두어도 좋습니다. 보통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죽은 공간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테이블을 두어도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습니다. 벽엔 창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 식물이 자라기에도 좋은 환경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 신간 ⟪우리 집 식물 수업⟫에도 한 꼭지로 소개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환자에게 하루 20분 햇빛 아래를 산책하라는 처방을 내린다고 합니다. 티셔츠 한 장에 운동화를 신고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봄입니다. 산책로에 피어오르는 풀과 꽃을 바라보며, 흙의 향기를 가슴 깊은 곳까지 불어넣으며 걷다가, 식물 이름이 궁금해지면 사진을 찍어 '모야모' 앱에 올려 봅니다. 전문가들이 이름을 금세 가르쳐 줄 거예요. 식물은 전 세계에 약 70만 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름을 다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저 즐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보는 거예요.

이 봄을 위해 벚나무는 작년 봄, 꽃이 진 다음부터 꽃망울을 맺어 봉오리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가을, 산책로를 따라 달리다 왕벚나무를 만났을 때, 추운 겨울 동안 메마른 가지에서 온 힘을 다해 꽃봉오리를 키우는 걸 보곤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열심히 삽니다.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카렐 차페크는 ⟪정원가의 열두 달⟫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작고 여린 것에 관심을 갖고 키우는 건, 사랑입니다.

※ 글, 사진 제공: 초록생활_정재경 대표